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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 The philosopher and the wolf - Mark Rowlands

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 The philosopher and the wolf - Mark Rowlands

2013년 여름방학(내내 읽음: 이게 뭐라고...)

 어느 철학자(마크 롤랜즈! 교수님이십니다)와 어느 늑대의 11년간의 삶의 기록이자, 늑대를 통한 철학의 기록. 마치 일기 같습니다. 책에 그런 수식어가 들어있기도 하구요. 사실은 거의 철학책이고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제공합니다. 흥미롭지요. 

 철학적 사유는 인간의 전유물인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입니다. (사실 전유물이기는 합니다. 저자는 동물의 행위에서 철학을 읽은 것이지, 동물이 철학해서 함께 철학한건 아니니까요) 본능이라는 것이 욕망이나 인간의 탐욕 등의 '이기적인 본성'에 의해서 가리워지게 되는 이유는 타인을 속이거나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 생존의 구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작가가 늑대와의 동거를 통해서 인간의 실존이나 본질적인 특성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를 생각해보게 되었던 계기들에 대해서 [에피소드 - 철학적인 성찰] 두 단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책에 따르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상황에 대한 본능적인 수용을 잊었고, 이성적인 판단과 조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철학적인 문제들을 늑대와의 삶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그 중 재미있는 것은 행복과 시간에 대한 늑대의 관점입니다. 

 늑대는 어떤 것에 대해서 행복할까. 와 늑대는 어떤 시간을 살까. 라는 대답은 간단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사는 인간과는 다르게 늑대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현재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은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바로 과거가 되는 순간이지만, 늑대의 입장에서는 다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때문에 늑대는 미래를 바라보며 걱정하지 않고 과거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현재를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한 인간이 늑대라는 대형 육식 포유류(하지만 이 늑대는 채식-페스카테리언-주의자가 됩니다.)와 함께 살아가는 내용을 철학과 엮은 것 치고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감동도 있는 편이구요. "꿈에서 만나자"라니, 너무 마음이 찡하더라구요. 

인상 깊었던 부분 * Digest --
추수밭 판, 강수희 옮김
[1] 20: 영장류는 동료 영장류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시한다. 영장류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공격할 시점을 기다리는 것이다. 영장류는 변하지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 단 하나의 원칙에 근거해 동료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성향이다. 그 원칙은 바로, "상대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으며, 그 대가로 나는 어느 정도를 해 주어야 하는가?" 이다. 
[2] 22-23: 늑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늑대는 진정한 가치는 잴 수도 거래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은 하늘이 두 동강 나도 옳은 것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략) 가장 중요한 나는 교묘한 계략에 기뻐할 때가 아니라 그 교묘한 꾀에 스스로 속아서 버려진 나이다. (중략)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다.
[3] 23: 가끔 수다쟁이 영장류 대신 내 안의 과묵한 늑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책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늑대를 대변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다. 
[4] 62: 아직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보면 늑대가 인간 집단에 애착을 느껴 개가 된 시점이 있다. 즉, 이것도 늑대가 늑대로 계속 남아있는 것 만큼이나 자연의 의도인 것이다. 
이것은 내가 철학에서 배운 매우 유용한 사고법이다. 누군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의 전제부터 되짚어 보는 것이다. 누군가 늑대는 집단 생활과 사냥 같은 자연적 행동을 할 때만 행복하다고 주장한다면 먼저 그 전제부터 본다. 그 속에는 대부분 인간의 거만함이 표현되어있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것은 실존주의로 알려진 철학 사조의 기본 명제이다. 그는 인간 존재가 대자적 존재(being-for-itself)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가 즉자적 존재(being-in-itself)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5] 206: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란 사실이다. 잘 살고 못사는 문제와 상관없이, 삶의 질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6] 208: 감정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결과 인간은 노이로제에 걸렸다. 노이로제는 감정 생산에서 감정 점검으로 초점이 옮겨질 때 나타난다. (중략) 물론 삶을 점검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은 우리 자체고, 행복한 삶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특성상 우리는 삶을 점검하는 올바른 방식을 터득하지 못한다. 삶을 점검하는 것이 감정을 점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정을 점검할 때 그 내부를 살펴서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부재하는지 확인하여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우리는 스스로 희망하거나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착한 행복 중독자들은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 새로운 애인, 새로운 자동차...(하략)
[7] 214: 브레닌이 사냥을 할 때 행복했다면, 녀석에게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중략) 그런데 브레닌의 행동은 토끼를 잡았을 때만 행복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냥이 끝나면 성공했든 실패했든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껑충껑충 뛰어와 달려들었다. 이 것은 녀석이 기쁠 때 하는 행동이므로 행복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브레닌의 행복은 토끼를 턱으로 물었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중략)
행복은 즐겁지만은 않다. 동시에 매우 불편하다. -- 고진감래는 고생을 참고 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인과관계를 말한다. 고생해 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그 가치를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행복 자체가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행복의 필요조건으로서, 다른 방식으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한쪽을 헐어 내면 모두 허물어지는 구조물처럼 말이다. 
[8] 220(신정론)
221: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쫓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하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이후 무수히 불편한 순간들이 내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9] 267: 브레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달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야말로 이 미친 상태는 내가 많은 것을 잃었음을 보여주었다.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지난 세월동안 인간의 울타리에서 떨어져나와 외롭고 슬프게 지낸 은둔 생활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브레닌이 무엇을 잃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10] 268: 죽음이 무엇이든간에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시야에 한계가 없듯이 삶도 한계가 없다고 했다. 물론 그도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 또한 195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이 삶의 한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시야의 한계가 시야에 나타나지 않듯이, 삶의 한계도 삶에서 포착되는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시야의 한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계라는 것이 그렇다. 한계는 일부가 될 수 없다. 만약 일부라면 그것은 한계가 아닐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즉 죽음은 당사자에게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이미 훨씬 오래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제기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죽음은 삶에 속한 사건이 아니라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해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게는 말이다. 
[11] 282: 바로 이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는 삶의 시간을 일직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직선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욕망과 목표와 과제의 화살들은 우리를 이 선에다 옭아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중략) 시간이라는 선의 앞뒤로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순간만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뒤로 유예되어 버리고 현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현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순간은 유예되어 시간 속에 퍼져있다. 순간은 비현실적이다. 순간은 항상 우리들을 피해 달아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절대로 순간에 있을 수 없다. 
물론 인간 중에도 일상과 의식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다른 것을 갈망하기 마련이다. 
(중략) 지금부터 영원까지 오직 팽오쇼콜라만 먹는다고 해도 행복할 표정이었다. 그들의 턱관절이 팽오쇼콜라를 씹고 있을 때는 그 순간 자체로 완벽한 것이다. 시간 속에 퍼져있는 다른 어떤 순간들과도 섞이지 않은, 그런 순간이었다. 그 순간 전후에 일어날 일들이 더 추가되거나 덜어지지도 않은 완전한 순간이었다. 
인간에게는 순간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순간들은 혼탁해져 있다.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시간의 화살은 우리를 창백하게 하고 죽게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다. 
니체는 영원 회귀 즉, 영원히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현상을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이를 크게 두 가지로 해석했다. 그 중 하나는 슬쩍 건드리기만 했고, 나머지 하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첫 번째 해석은, 영원회귀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다. 이 맥락에서 형이상학이란 말은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분석이다. 영원회귀라는 것을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앞으로 실제로 일어날 일 또는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 무한히 반복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그(니체)가 정식 발표한 논문 속에서 지지했던 것은, 우리가 '영원회귀의 실존적 분석'이라고 부를 법한 것이다. 이 분석에서 영원 회귀의 개념은 우리들에게 실존적인 실험을 제공한다. <즐거운 학문The Joyful Wisdom>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략) 여기에서 니체가 말한 것처럼 모든 기쁨은 영원하기를 원한다. 당신의 삶이 잘 진행되고 있다면 삶이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을 확률이 높다. 당신의 삶이 삐걱댄다면 위와 같은 생각은 공포스러울 것이다. 이 정도는 심오하다기 보다 당연하겠다. 덜 당연한 것은 악마로부터 전해들은 위의 사실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12] 289: 그렇다면 영원회귀는 우리 영혼의 상태가 상향인지 하향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다. 실존의 실험이란 바로 이런 개념이다. 
한데, 여기 영원회귀라는 개념의 중요한 역할이 하나 더 남아있다. 그것은 시간을 일직선으로 보고 삶을 설명하면서 삶의 의미 자체를 축소시키는 역할이다. 우리는 시간을 일직선으로 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우리가 목표로 하고 바라보는 어떤 것이라고 간주하여 시간이 한참 지나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은 항상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순간에 있지 않다고 본다. 더 나아가 그 순간들의 의미는 일직선상의 어떤 시점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기억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일 또는 기대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일들로 구성된다. 다라서 어떤 순간도 그 순간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다. 모든 순간의 내용과 의미는 유예되어 있으며, 시간의 화살이라는 길고 긴 직선 위에 분포되어있다. 
[13] 304: 우리에게 순간은 절대로 완전한 현실이 아니다. 순간은 거기에 없는 것이다. 순간이란 미래와 과거의 유령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들의 메아리이며,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일 뿐이다. 
에드문트 후설은 시간의 경험에 대한 전통적 연구에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세 종류의 경험적 요소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는 소위 '근원적 현재'라는 경험이 일부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반적 의식에서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의 경험을 향한 기대와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들로 이룽어져 있는 것이다. 후설은 전자를 경험적 추측, 후자를 잔재라고 불렀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손에 무언가를 쥐어보라. (후략, 현재의 경험은 주어진 상황에서 이 경험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가까운 과거에 경험한 변화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 -- 경험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경험으로부터 제약 받는다. 미래가 추측, 과거가 잔재라고 불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