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 신영복
(모월 모일 읽기 시작 / 모월 모일 마침)
책 자체는 신영복 교수님이 그동안 쓰셨던 현판들 – 글씨들을 찾아 다니는 여정에 대한 글을 모아둔 것이다. 담론 자체는 잔잔하지만 변방의 의미에 대해서 되짚어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인간의 역사가 변방에서 미미하게 시작하여 그 변방이 중심이 되고 또 다른 주변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반복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기초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와 궤를 같이 하여 신 교수님의 글씨들이 모두 ‘변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변방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보충)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왔다. 역사에 남아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들 역시 변방의 삶을 살았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도처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오리엔트의 변방이었던 그리스-로마, 그리스-로마의 변방이었던 합스부르크와 비잔틴, 근대사의 시작이 되었던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은 그 중심지가 부단히 변방으로, 변방으로 이동해 온 역사이다. 우리는 왜 문명이 변방으로 이동하는지, 변방이 왜 항상 다음 문명의 중심지가 되는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변방에 대한 즉물적 이해를 넘어 그것의 동학(動學)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동학은 운동이고 운동은 변화이다. 문명도 생물이어서 부단히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도 변방의 역사이다. 문명의 중심이 변방으로 옮겨 간 역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대에서부터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변방의 역동성이 중심부로 진입하여 새롭게 만들어 온 역사이다. 치세와 난세를 거듭하는 중국사 자체가 변방과 중심의 부단한 교체이다. 현대 중국에 대한 이해의 관건 역시 변방의 창조성이다.
중요한 것은 변방이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변방성, 변방 의식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변방성, 변방 의식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어떤 장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변방 의식을 내면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략: 인간의 위상 자체가 기본적으로 변방이며 이는 우주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내용)
때문에 변방 의식은 세계와 주체에 대한 통찰이며, 그렇기 때문에 변방 의식은 우리가 갇혀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 문맥이며,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 그 자체이다. 변방성 없이는 성찰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세상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도 그러하고 (중략) 스스로를 조감하고 성찰하는 동안에만, 스스로 새로워지고 있는 동안에만 생명을 잃지 않는다. 변화와 소통이 곧 생명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장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그야말로 ‘변방’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그렇다. (중략)
콤플렉스는 마치 잠재의식처럼 무의식을 지배한다. (문장 생략)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사회 문화속에 구조화 되어 있는 경우라면 최소한 그 사회는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목표를 세우지 못한다. (중략: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콤플렉스를 깨닫는 일이고 이 일이 가능한 공간은 변방이라고 한다.)
57p를 인용한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딱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사람이다.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 한다는 것에서 보면 어리석은 자들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우직한 이들에 의해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왔다는 사실이다.
* 이 책에서 몇 부분 발췌해서 읽을 만한 곳을 골라보았다.
Digest — (이 줄과 윗 줄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추가] 52p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눈다. 항민은 순종하며 부림을 당하는 백성, 원민은 윗사람의 수탈을 원망하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백성임에 비하여, 호민은 허균이 찾는 이른바 변혁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사회 부조리를 꿰뚫고 때를 기다렸다가 백성들을 조직/동원하여 사회 변혁을 영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홍길동이 바로 그런 인물로 보여진다)
– 체제와 주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고 주체성과 저항성을 확보하고 있는 민중이 호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신영복 교수님)
– 자세한 것은 돌배게 출판, 정길수 편역의 ‘호민이 두렵다’,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2012 참고
[1] 89p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강자’의 면모로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중략)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최사한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대응 방식에 관해서도 무심하지 않아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결코 약하게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는 문신을 하거나 성깔 있는 눈빛을 만든다. 위악을 연출한다.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는 위악을 주 무기로 하고 반면에 사회적 강자는 위선을 무기로 한다. 극적 대조를 보인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법정의 정숙이 그것이기도 하다.
[2] 100p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뜨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나를 남겨두고 종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대산 1만 문수보살의 조용한 기립이 감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정(靜)이라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적(寂)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寂滅)이다. (탈접동시)
[3] 118p 햇볕 속으로 걸어나온 전주에서 오늘 10분 거리에 있는 두개의 추모비와 100년 간격의 역사를 동시에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삶과 역사의 엄청난 인연에 숙연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강문의 표면에 투영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는 수많은 사연들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치 강문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 된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란 인연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또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엮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렇거든 하물며 역사의 인연이야 오죽하랴. 거대한 산맥이 서로 밀고 당기듯 그 우람한 역사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 / 김개남 장군 추모비 부분)
[4] 124p “북악은 왕조를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를 상징한다. 북악은 5천년동안 백성들의 고통에 무심하였지만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700리 유정하게 흐르고 있다”라고 썼다. 산천에 더하여 천시(天時)와 인화(人和)의 역사를 담은 셈이다.
[5] 126p (전략) 박원순 시장을 만나자 이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 시청이 변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변방의 애환을 시정에 담는 것이 자신의 시정 철학이라는 것이었다. 소외된 이웃과 소통하고 사회적 약자의 애환에 귀 기울이는 시정을 꾸려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6] 137p (전략) 노무현을 ‘스스로를 추방한 자’라고 썼다. 그렇다.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추방한 자가 바로 노무현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계급을 선택하는 계급이라고 한다. 노무현이야말로 ‘사람다운 삶’을 자기의 삶으로 선택했다. 변호사,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서 있는 동안에도 언제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변방으로 추방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망국의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죽음마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추방이다.
(중략)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꿈을 짓밟는 상황으로 몰리고 그 꿈을 함께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누가 되는 상황으로 떠밀리자 자신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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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부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히 많은 현판에 신영복 교수님의 글씨가 들어가 있다. 이 책을 계기로(남들과는 순서가 다른 것 같다) 신영복 교수님이 쓰신 책을 몇권 더 읽게 되었다. 나머지는 읽는대로 정리해서 올리는게 후기나 감상을 쓰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므로 바로바로 정리하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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